Ironstone Insight · 돈은 왜 움직이는가
왜 어떤 돈은 기업을 버티게 하고, 어떤 돈은 위기의 순간 가장 먼저 돌아설까?
WHAT | 은행을 찾지 않기 시작한 대기업들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는 달러당 약 240엔에서 1988년 초 120엔대까지 올랐다. 일본은행은 공정할인율을 1986년 1월 5.0%에서 4.5%로 내린 것을 시작으로, 1987년 2월 2.5%까지 다섯 차례 인하했다.
같은 시기 금융시장 안쪽에서는 눈에 덜 띄는 변화가 있었다. 일본의 대기업들이 은행대출에만 기대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1979년 무담보사채와 전환사채 발행 요건을 충족한 기업은 도요타와 마쓰시타 두 곳뿐이었지만, 1988년에는 무담보사채 약 300개사, 전환사채 약 500개사로 넓어졌다.
WHY | 같은 100억 엔이라도 같은 돈이 아니다
같은 100억 엔을 조달한 두 회사가 있다. 한 회사는 10년 만기 사채와 자기자본으로, 다른 회사는 1년 만기 차입금으로 마련했다. 매출과 영업이익이 같다면 손익계산서로는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 해 시장이 닫히면 한 회사는 기다릴 수 있고, 다른 회사는 1년 안에 누군가에게 다시 돈을 빌려야 한다.
돈이 어디에서 오느냐에 따라 성격도 다르다. 은행에서 빌린 돈은 은행이 기업을 심사하고 대출 이후에도 계속 지켜보는 돈이다. 회사채도 빚이지만 한 은행과의 협상이 아니라 시장의 평가와 투자자의 수요에 좌우된다. 주식은 정해진 날짜에 갚을 필요가 없는 대신 지분이 나뉜다. 시장에서 돈을 구한다고 심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은행 대신 신용등급과 공시, 투자자의 판단이 기업을 평가한다. 다만 그 기대는 은행과의 관계보다 훨씬 빠르게 변한다.
버블 때 기업들이 많이 쓴 전환사채와 워런트채는 주가가 계속 오른다는 전제 위에 있었다. 상장기업의 주식 조달 총액은 1986년 0.87조 엔에서 1989년 8.8조 엔으로 열 배가 됐고, 그중 4분의 1가량이 워런트 행사분이었다. 1990년 주가가 떨어지자 전환되지 않은 채권은 갚아야 할 부채로 남았다. 싼 돈처럼 보였던 자금에는 처음부터 조건이 숨어 있었다. 좋은 시장에서는 조건이 보이지 않고, 나쁜 시장에서 계약의 본질이 드러난다.
은행대출도 마찬가지다. 공장과 건물은 10년, 20년에 걸쳐 현금을 만든다. 그런 자산을 1년 만기 차입금으로 샀다면 기업은 매년 시장의 허락을 다시 받아야 한다. 시장이 닫히는 순간, 사업이 흑자여도 차환에 실패하면 현금이 마른다.
좋은 고객이 떠나자 은행의 돈은 다른 곳을 찾았다. 국내 기업대출에서 대기업 비중은 1975년 말 40% 이상에서 1990년 말 약 20%로 줄었고, 중소기업 비중은 약 35%에서 약 65%로 늘었다. 은행은 중소기업과 부동산 관련 부문에서 새 대출처를 찾았고, 토지 담보의 역할이 커졌다.
대기업의 직접금융 확대 → 은행대출 수요 감소 → 중소기업·부동산 관련 대출 확대 → 토지 담보 비중 확대
같은 시기 대기업은 반대편에서 자금을 쌓고 있었다. 1988년 비금융기업의 초과 금융자산은 명목 GDP의 29%로 정점에 이르렀다. 은행에서 멀어진 대기업의 돈과, 새 대출처를 찾은 은행의 돈이 같은 자산시장에서 만난 셈이다.
WATCH | 이익보다 대차대조표의 오른쪽을 본다 (2026년 10월 기준)
금융 현장에서 기업을 볼 때는 이익만큼 이 회사의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본다. 다섯 가지를 묻는다.
- 만기 이 돈을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는가. 한 해에 몰려 있지는 않은가.
- 가격 고정금리인가 변동금리인가.
- 상환 의무 반드시 갚아야 하는 돈인가, 손실을 흡수하는 자기자본인가.
- 공급자 은행 하나, 시장 하나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지는 않은가.
- 사용처 현금흐름을 만드는 데 쓰이는가, 자산가격 상승에 기대어 들어갔는가.
부채가 위험하고 자기자본이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좋은 돈과 나쁜 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업의 성격에 맞는 돈과 맞지 않는 돈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조달조건과 자산의 성격이 어긋날 때 생긴다.
은행도 늘 보호막은 아니다. 1997년 11월 홋카이도척식은행과 야마이치증권이, 1998년에는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이 무너지며 ‘가시시부리(대출 기피)’가 일본 금융위기의 상징이 됐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돈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의 일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책금리는 1.25%가 됐고 10년 국채금리는 3%를 넘었다. 오랫동안 싼 돈에 익숙했던 기업이라면 다음 만기와 그때의 조달 조건을 다시 봐야 한다.
IRONSTONE INSIGHT | 돈의 양보다 먼저 성격을 본다
갚아야 하는 돈과 손실을 흡수하는 돈. 내일 돌아가야 하는 돈과 10년을 기다려 주는 돈.
이 돈은 언제, 어떤 조건에서 떠날 수 있는가.
KEY TERMS
간접금융 · 직접금융 은행이 예금자와 기업 사이에서 돈을 중개하면 간접금융, 기업이 주식이나 회사채로 투자자에게서 직접 조달하면 직접금융이다.
만기구조 부채의 상환 시점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를 뜻한다. 장기자산을 단기자금으로 조달하면 차환위험이 커진다.
SOURCES
- Hattori, Shin, Takahashi, “A Financial System Perspective on Japan’s Experience in the Late 1980s,” 日本銀行 IMES Discussion Paper 2009-E-19
- 日本銀行, 「基準割引率および基準貸付利率の推移」
- ニッセイ基礎研究所, 「転換社債・ワラント債の大量発行の残した問題点」(1991.4)
- 預金保険機構, 「日本の金融危機の教訓」
NEXT INSIGHT
가장 우량한 대기업이 은행을 떠나고, 은행은 새 대출처를 찾았다. 그 돈이 땅으로 향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