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가 내려갔는데, 일본 기업은 왜 투자 대신 빚부터 갚았을까

Ironstone Insight · PART 2 세계사와 자본 · Chapter 10

은행이 금리를 낮춰 주겠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공장을 넓힐 기회입니다. 그런데 경영자는 새 대출보다 기존 빚을 줄일 생각부터 합니다. 주문이 늘지 확신할 수 없고, 보유한 땅값은 떨어졌고, 빚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상담이 아니라 당시 기업들의 계산을 압축한 가상의 장면입니다.)

금리가 내려갔는데, 일본 기업은 왜 투자 대신 빚부터 갚았을까 — Ironstone Insight 일러스트

금리가 내려가도 빚 원금은 그대로다

자산 100억 엔, 부채 70억 엔인 가상의 기업을 생각해 봅니다. 자산이 60억 엔으로 떨어지면 자산과 부채의 차이는 +30억 엔에서 -10억 엔이 됩니다. 금리를 낮추면 이자는 줄지만 70억 엔이라는 원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기업이 현금을 벌어도 먼저 빚을 갚는 건 이상한 행동이 아닙니다. 경제학자 리처드 쿠는 이를 대차대조표 불황이라고 불렀습니다. 기업이 투자 확대보다 부채 축소를 앞세우면, 낮은 금리만으로는 민간 수요를 되살리기 어렵다는 설명입니다. 일본의 긴 침체를 이것 하나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좋은 설명입니다.

다들 허리띠를 졸라매자 경제 전체가 움츠러들었다

제조업체 열 곳이 서로의 부품을 사 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모두가 같은 해에 주문을 10% 줄이면, 한 기업의 비용 절감은 나머지 아홉 기업의 매출 감소가 됩니다. 열 곳 모두 합리적으로 행동했지만, 함께 만든 결과는 아무도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가와 판매가격이 내려가면 부담은 더 무거워집니다. 같은 1억 엔을 갚아야 하는데 제품 한 개를 팔아 받는 돈이 줄면 필요한 판매량이 늘기 때문입니다. 명목금리가 낮아도 부담은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은행에 돈이 있어도 대출이 늘지 않은 이유

1997년 11월 홋카이도척식은행과 야마이치증권이 무너졌고, 1998년에는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이 뒤를 이었습니다. 자기자본과 유동성이 흔들린 은행이 위험을 줄이는 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기업에는 가장 필요한 순간에 돈이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가시시부리(貸し渋り)’, 곧 대출 기피라고 불렀습니다.

반대쪽 문제도 있었습니다. 손실을 확정하는 대신 만기를 연장하면 당장의 충격은 미룰 수 있지만, 회복 가능성이 낮은 기업에 자금이 계속 묶입니다. 연구자들은 이런 좀비 대출이 건강한 기업의 투자와 고용에도 불리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다만 모든 만기 연장이 좀비 대출은 아닙니다. 구분 기준은 연장 뒤에 갚을 능력이 나아지는가입니다.

일본은행은 1999년 제로금리, 2001년 양적완화를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은행에 돈을 쌓아 주는 일과 은행이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일은 별개입니다. 대출에는 차입 수요와 상환 능력, 은행의 자본이 따로 필요했습니다.

은행 현장에서 보면: “왜 돈이 부족한가”부터 묻는다

어려워진 기업을 볼 때 첫 질문은 “지금 돈이 부족한 이유”입니다. 대금이 늦어진 것인지, 이익 나던 사업이 일시적으로 흔들린 것인지, 팔수록 손실이 나는 구조로 바뀐 것인지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세 번째 경우에는 싼 이자가 기업을 구해 주지 못합니다. 만기 연장을 요청받았을 때도 질문은 같습니다. “연장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달라지는 게 없다면 연장은 시간을 사 주는 일이 아니라 손실을 미루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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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이 끝난 뒤의 시간은 가격이 다시 오르기를 기다리는 시간만이 아니었습니다. 기업은 빚을 줄였고, 은행은 손실을 감당했고, 가계는 미래 소득을 다시 판단했습니다. 모두가 각자 안전해지려다 보니, 새로 돈을 쓰려는 곳이 사라졌습니다.

돈이 많이 풀리는 것과 그 돈을 쓸 이유가 있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지금 풀리는 돈은 과거의 부담을 감추고 있을까요, 아니면 다음 수입을 만들 시간을 주고 있을까요?

간단 용어정리

  • 대차대조표 불황 자산가격 하락 뒤 기업이 부채 상환을 우선하면서 수요가 약해지는 불황
  • 양적완화(QE) 중앙은행이 자산 매입과 유동성 공급으로 금융 여건을 완화하는 정책
  • 좀비 대출 회복 가능성이 낮은 차입자에게 손실 인식을 미루려 이어 가는 대출

출처

  • 리처드 쿠, 대차대조표 불황 이론
  • 카바예로·호시·카시압, 일본의 좀비 대출 연구
  • 일본은행 양적완화 도입 자료(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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